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 사콘 (문단 편집) === [[이시다 미츠나리]]의 밑으로 === 나이 40이 넘어서 역사의 주무대에 비로소 서게 된다. 그 무렵 사콘은 선대 츠츠이 쥰케이가 죽은 후 뒤를 이은 그 사람의 조카인 츠츠이 사다츠구와 의견이 맞지 않아 출번하여 유곽을 전전하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각지의 영주들이 명사인 사콘을 초빙하려고 찾아오곤 했다. [* 워낙 기록이 별로 없어서 일개 낭인을 저렇게 초빙하려하는지 의문일 수 있는데, 여러 가문을 섬겼지만 번번히 그 가문이 망해버려서 여기저기 떠돌았을 수 있는데 그가 참전했던 전투 때마다 아군이던 적군이던 그의 실력이 상당히 입소문이 났을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실력 좋은 무사가 없어서 아쉬웠던 전국시대 때는 이런 인물은 당연히 스카웃 대상이다. 다만 역사의 표면에 드러날만큼의 직책이나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명성에 불구하고 기록이 별로 없을 수 있다. 그리고 미츠나리의 밑으로 오면서 그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남게된 것.] 이 무렵 시마 사콘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한 과정은 약간 불투명해서 일반적으로 자신의 봉록 4만석 중에 반절에 해당하는 2만 석을 제안했고 끈질기게 들러붙은 끝에 그 열의에 져서 사콘이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시다가 사와야마 14만 석의 봉록을 받게 된 다음에 2만석을 제안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불확실하긴 하다. 참고로 석고가 1만석이면 다이묘급[* 석고가 1만석이라고 해도 영지를 쇼군에게 받아야 한다. 쇼군이 하사한 영지를 가졌어도 1만석 이하면 다이묘가 이니다.]이므로 대단한 고액연봉에 해당한다. 뛰어난 장수의 당시 평균이 되는 몸값은 5천 석에서 1만5천 석 정도이며 2만 석이라는 것은 상당히 파격한 제안이다. 아니 1만 석 전후는 거대한 각 가문의 레전드급의 무사들이나 조상 대대로 주군을 모시며 영지를 키워 나아간 후다이 가신들이나 받을 수 있는 녹봉이다.[* 알고 보면, 일본 전국시대史를 보면, 실제로 레전드급이 아니라도 1만 석 이외의 가신들이 의외로 많기는 하다. 허나 이것은 대부분 조상대대로 주군을 모셔 왔던 예로서 몇 대를 이어가며 영지를 계속 늘려 나아간 때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혼다 타다카츠]]는 혼다 가문 15만 석이지만, 따지자면 혼다 타다카츠가 10만 석, 그 아들인 타다모토가 5만 석.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혼다 타다카츠의 할아버지인 혼다 타다토요와 아버지인 타다타카의 도쿠가와를 향한 충성과 죽음도 혼다 가문 15만 석을 만드는 데 공헌했다고 봐야 하리라.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지 가진 건 자기 몸뿐인 인물이 가문에 들어와서 1만석 이상 녹봉을 받는 가신이 된 예는 몇 없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평민]]+[[타키가와 카즈마스|닌자]]+[[아케치 미츠히데|쇼군 부하]] 출신 등이 대다이묘로 출세한 오다 가문만은 예외, 뭐 이런 혁신성을 띤 인재 운용을 오다 가문의 성공 비결로 뽑고는 하니까....] 검객으로 최대한 출세했다는 [[야규 무네노리]]가 1만 석을 겨우 넘고 가장 유명한 닌자라는 [[핫토리 한조]]가 그 활약에도 수천 석의 하다모토였으며 해적들 중 최고 명문이라는 무라카미家의 가장 유명한 방계 구루시마가 2만 석이니 일개 낭인 무사를 단번에 다이묘급으로 만들어 줬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일화는 와타나베 칸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제안한 호걸이었으나 당시 5백 석에 불과했던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히데요시가 묻자 칸베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장래 100만 석이 되면 자신에게 10만 석을 줄 것을 약속했는데 미츠나리의 큰 그릇을 보고 감동했기에 미츠나리에게 사관했다고 말했고 거기에 감동한 히데요시는 칸베에의 봉록을 늘려 주려고 했으나 칸베에는 미츠나리가 100만 석이 될 때까지 자기는 500석만 받겠다고 하여 히데요시가 매우 감동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미담으로서 이름 높은 이 일화는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패배해서 와타나베 칸베에도 자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참고로 그때도 100만 석을 받는 다이묘는 [[마에다 토시이에]] 정도였고 다이묘 대부분은 고작 수만 석에서 십수만 석 정도에 불과했다.]의 것을 시마 사콘의 것으로 바꿔서 전했다는 설도 있다. 매우 여유만만한 성격인 모양으로 계략을 꾸밀 때도 대담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스로 낭인 행색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미츠나리의 보좌로서 조선에 건너오기도 하였으며, 히데요시 사망 후 이에야스가 집권하자 미츠나리에게 이에야스 암살을 진언하였으나 대의명분을 중시한 미츠나리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에야스 암살 계획을 [[나츠카 마사이에]]와 독단으로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이에야스가 눈치 채고 해당 지역을 황급히 벗어나는 바람에 실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